책을 접하게 된 계기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스토리로 짱 먹은 게임들을 알아보자 | with 이낙준, 장홍제' 편이었다. 영상의 초반에서 장홍제라는 화학자가 자신이 최근에 집필한 '오늘도 게임하는 화학자' 책을 소개하며 출판사의 다른 책도 소개해줬는데 거기에 이 책이 있었다. 정확히는 이 책의 연작 중 3번째에 해당하는 '밤보다 긴 촉수'였다.
소개 멘트가 강렬했다. '점액, 촉수가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책이었다. 게임 개발을 떠나서 매체에서 자주 다뤄지는 이 불쾌한 표상들은 인간의 어떤 기원에서 출발한건지 이 이면을 알고 싶었던 나에게 적합한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사려고 보니 '철학의 공포' 연작 중 첫번째 저서도 출간된 것을 발견하고 두 개 다 사버리고 말았다.
40페이지를 읽은 뒤의 단상
이 책은 단순히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만을 다루지 않는다. 실제 철학자, 교수인 저자가 쓴 책인만큼 논리정연하게 예로부터 세계에 존재했던 악마의 표상이 어떻게 출현하게 됐는지를 조명하고, 또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과거 조사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자연재해, 기후위기 등 인간을 초월하는 위협에 대해 어떤 식으로 개념화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서문 '무지의 구름'에서 저자는 인간의 세계를 대하는 관점은 더이상 인간 중심적 관점으로 쪼그라뜨릴 수 없고 비인간적인 세계의 문제까지 사유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1장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 크툴루 신화 창작자로 유명한 H. 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의 부름' 중 일부를 인용한 글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인간이 자기 마음속의 모든 내용을 연결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리라. 우리는 무한이라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 있는 무지라는 정온한 섬에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멀리까지 항해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자 나름의 방향으로 뒤틀리며 나아가는 여러 과학은 지금까지는 그리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분열된 지식들이 짜 맞춰지면, 현실의 진정 무시무시한 전망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의 끔찍한 처지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폭로 때문에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이 치명적인 빛으로부터 도망쳐서 새로운 암흑기의 평화와 안전을 찾으려 할 것이다.
정확한 21세기에 대한 진단으로 생각했다. 과거 선조들은 아는게 적었다. 그렇기에 아는 것 안에서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였다. 적, 악마를 만들어도 자신들이 규정한 '선한 것'에 대립되거나 전도되는 대상을, 또는 아예 주류로부터 배제되거나 타자화되는 이교적인 대상이었다. 그 표상은 빛과 대립되는 어둠, 뿔이 난 염소, 흑마법, 장미십자회, 프리메이슨 등으로 인류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21세기 지구는 더이상 그런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과 씨름할 여유가 없다. 러브크래프트의 말처럼 인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현대 문명을 거룩하는 과정에서 인류가 밟아온 발자국이 어떤 모양인지, 앞으로 인류에게 남은 미래는 어떤지에 대해서도 알게돼버렸다. 우스갯소리로만 하던 화성 탐사는 일론 머스크라는 천재가 도맡아 현실화하려 애쓰는 중이다. 더이상 인류에게 장밋빛 미래는 없다는 비관주의 아래에 현대 매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초자연적인 존재', 압도적인 힘, 공허와 같이 기존의 사유 체계로는 사유할 수 없는 불투명한 존재들이 악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인간의 한계가 자꾸만 범지구적인 세상과 충돌하는 이 시대의 두려움에 대해 조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저자는 서문 '무지의 구름'에서 3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에-대한-세계(world-for-us, 세계), 세계-자체(world-itself, 지구) 그리고 우리-없는-세계(world-without-us, 행성)
여지껏 인류는 세계를 우리에-대한-세계로 주조하려는 시도와 이에 대해 '종종' 반격하고 저항하는 세계-자체의 두 관계만 생각했다. 가끔씩 자연재해의 형태로 세계-자체가 존재감을 드러낼 때 인류는 이 대상을 두려워하고 경외했지만, 이 세계-자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릴 수 있었고 세계 구성에 있어 그다지 많은 비중을 할애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에-대한-세계의 비중만큼이나 동일하게 우리-없는-세계에 대해 비중을 두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모호한 철학은 언제나 인간적 관점의 틀 내에서 규정하려는 시도를 뿌리치고, 사유는 인간적이지 않다(신체의 90%가 비인간 유기체-박테리아, 균류 등인 것처럼)는 한 차원 위의 관념으로부터 출발해 우리에-대한-세계나 세계-자체 바깥의 '저멀리 저편'에서 찾으려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세계(우리에-대한-세계)와 지구(세계-자체)의 틈새에서 찾겠다는 다짐으로 귀결된다.
...역시 철학 책인만큼 40페이지 분량에도 거진 하나의 책에 해당하는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읽다간 망망대해에 표류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멈추고 독후감을 남기기로 했다.
읽으면서 아케인2의 빅토르 변신 장면이 떠올랐다. 현실에서 고통받던 인간이 사건을 통해 인간성을 뒤로하고 비인간적인 우주 자체가 되는 것.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 작품은 인간적 존재의 우주적 재탄생이란 모티프로 표현했다.
그리고 모든 창작물이 그렇듯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은 항상 주인공에 의해 부숴져야하는 숙명을 따른다. 빅토르도 마찬가지고 진격의 거인 에렌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타임루프 설정을 넣어 이미 깨달은 존재가 자신을 막아주길 원해 당시엔 알 수 없는 표현들로 흔적을 남기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