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섬 라퓨타〉

April 26, 2026 (Today)

0 views

⚠️

스포 주의

영화를 보게 된 계기

몇 주 전 창작자를 위한 지브리 스토리텔링 책을 읽으면서 정기적으로 피어오르는 지브리 영화 탐독 욕구가 다시 솟아올랐다. 책 속에서 굉장히 많은 지브리 영화들이 언급됐는데, 나는 굳이 따지자면 지브리 영화들을 모두 알지만 실제로 본 건 몇 개 없는 반(反) 매니아에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두 작품을 제외하면 아는 작품이 없었다. 그래서 조만간 시간을 내어 지브리 영화들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최근에 팀 프로젝트로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야 했고 자연스레 내가 스토리텔링을 맡아 자료조사를 하던 중, 내 팀의 스토리 모티프가 '신에게서 인간의 욕망 3가지가 세상에 흩어져 어지러워졌고, 인간의 육신으로 재탄생한 신(주인공)이 그것들을 되찾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브레인 스토밍으로 나온 3가지 요소 중 첫 번째가 '유한함'이었기에 해당 키워드로 자료를 검색해보니, 마틴 하이데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거쳐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닿을 수 있었다.

"인간은 유한하면서도 유한한 조건을 초극하려고 무한한 행복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단지 필연성과 유한성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가능성과 무한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말하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탐구하다보니 신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라는 글을 읽게 됐는데, 기독교에서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됐다.

글의 질이 매우 좋아서 자연스레 다른 글까지 보게 됐는데, 단기간에 책을 잘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독서의 태도, 독서 팁, 그리고 개인적인 도서 추천이란 글에서 〈데미안〉을 추천받게 된다. 그 날 퇴근길에 즉시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초반부에서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해 이해를 위해 이 키워드로 또 검색을 해봤다. 그렇게 발견한 글이 카인(Cain)과 아벨(Abel), 그리고 "카인의 표식"란 글이고, 또다시 글의 질이 좋아 같은 블로그의 다른 글들을 탐독하다 아래 글을 읽게 됐다.

진격의 거인: "우리는 원죄가 아닌 세상을 대적한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진격의 거인이 단순 애니메이션에 불과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고찰을 담은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 그 다음날 4기에서 중도 하차한 〈진격의 거인〉을 오랜만에 다시 보기 시작했고, "The Final Season PART1"을 앉은 자리에서 모두 해치웠다. 여담으로 진격의 거인은 내가 호들갑을 떨기 전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떤 가히 명작이라 부를 수 있는 영상물인데, 그 중에 몇 가지 개인적인 추천을 남기고 싶다.

그렇게 며칠을 연달아 작품들을 보다 오늘 아침 유튜브에서 이 사진을 썸네일로 하고 있는 OST 영상을 접하게 됐는데, 그 즉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천공의 섬 라퓨타〉의 한 장면이었다. 지브리 스토리텔링 책을 통해 뚜렷한 적대자, 입체적인 조력자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마침 최근에 관심이 생긴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작 〈완다와 거상(Shadow of the Colossus)〉의 줄거리와 비슷하다고 느껴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했다.

줄거리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은 캐릭터는 '해적단 도라'였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미야자키의 작품에서 강인한 여성상이 돋보인다는 사실은 이 첫 공식 작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굉장히 특이한 핑크색 중력을 거스르는 삐삐머리에 요즘말로 여자 대장부다운 대사들과 영웅적인 비행기 조종능력과 리더십, 도라의 말에 끔뻑 죽는 아들들이자 해적단의 일원인 세 멍청하고 순진한 남자들, 어린 주인공들을 때로는 다그치기도 때로는 엄마의 품으로 안아주기도 하는 모습, 라퓨타 왕족의 후예인 여자 아이 류시타의 파즈 못지 않은 용감함 등이 강인한 여성상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도라는 극 중 초반에 명백히 시타를 포획하려는 악의 축으로 그려진다. 도라 일당 때문에 시타가 비행선에서 떨어져 위기에 처처하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비행석 목걸이와 그녀의 라퓨타 왕족 능력 덕분에 광산에서 정비공으로 일하는 파즈의 품에 무사히 안착하게 된다. 이내 시타와 목걸이를 군대 진영에 뺏기기 전까지 파즈와 시타는 군대와 해적단에게 쫓기게 되지만, 시타가 군대에 납치된 이후부터는 도라와 해적단은 차츰 적대자에서 조력자의 역할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도라와 해적단의 목표는 라퓨타 섬의 보물이었고 이들은 시타가 아니라 시타의 비행석을 노리고 있었다. 파즈의 집을 무단 점거하고 있던 해적단이 시타를 잃고 돌아온 파즈와 협상해 같은 일행이 되고, 우연히 시타가 감금된 군대 건물에 라퓨타 섬에서 떨어진 로봇이 시타의 주문에 깨어나 시타를 보호하기 위해 전투를 펼치면서 결국 목걸이를 잃지만 파즈와 도라에게 합류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라와 해적단은 파즈와 시타와 계약 관계를 넘어선 관계가 되고, 라퓨타 섬 직전 '용의 둥지'로 불리우는 거대한 구름 기둥 앞에서 '골리앗'이라 불리우는 군대의 공중전함의 공격을 받고 다시 둘로 흩어지게 된다. 파즈와 시타, 해적단 그리고 군대는 각각 라퓨타 섬에 착륙하게 된다.

여기서 해적단은 군대에 붙잡혀 위험에 처하는데 이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시타는 무스카의 손에 납치되고, 파즈는 해적단을 풀어주고 시타를 구하러 출발한다. 하지만 또다른 라퓨타 왕족이었던 무스카가 시타와 비행석을 이용해 라퓨타의 군사시설을 가동시키고 군대 일당들을 소멸시킨다.

무스카가 비행석 목걸이로 라퓨타 섬의 동력인 비행석 덩어리를 손에 넣으려할 때 시타는 도망치기 시작했고, 파즈를 만나 멸망의 주문을 외워 무스카의 손아귀에 섬을 넘겨주지 않게 섬을 붕괴시킨다. 그 과정에서 무스카는 주문의 빛에 눈뽕을 맞아 비틀거리다 추락하게 되고, 파즈와 시타는 가까스로 살아나 해적단과 탈출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탐욕을 부른 라퓨타 섬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우주로 날아가게 됐고, 해적단과 파즈시타는 서로에게 안녕을 고하며 헤어지고 영화는 끝나게 된다.

짧은 후기

우선 영화가 소리가 있지만 무성영화(無聲映畵, Silent film)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공식 첫 작품이며 개봉일이 1986년인만큼 특유의 아름다운 OST를 제외하고는 중간 중간 아무런 소리가 삽입돼있지 않은 공백이 많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의 표정 등 그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수면제같이 졸리게 만드는 효과도 있어서 영화가 끝난 뒤 단잠을 청하기도 했다.

주인공인 파즈와 시타는 순진한 어린이들이다. 파즈는 라퓨타 섬에 가야하는 이유가 라퓨타 섬과 관련된 아버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피상적인 이유였고, 시타 또한 비행석 소유자지만 딱히 능력 활용에 관심이 없고 이를 원하는 어른들에게 쫓기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주인공들이 라퓨타 섬에 당도하게 되는 계기도 결국 물질에 눈먼 어른들 때문이다. 그마저도 해적단은 단지 섬에 숨겨진 값비싼 보물에만 관심이 있다고 단언했고, 군대도 보물에 눈멀어 무스카에게 최후를 맞는다. 그래서 작중에서 가장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동기를 가진 인물은 웃기게도 가장 뚜렷한 악당인 무스카이며 이것만 놓고 따진다면 무스카 입장에선 딱히 확실한 근거도 없이 등장인물들이 계획을 '망친다'고도 해석할 수 있어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이유없이 누군가의 계획에 훼방을 놓는걸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설계에 있다. 로봇들이 지켜온 자연의 아름다움, 시타의 '땅을 떠나 살 수는 없다'는 외침과 짧은 순간이지만 무스카의 지시로 라퓨타 섬이 돌연 전쟁병기가 되는 장면은 등장인물들이 그토록 도달하고 싶어하는 '라퓨타 섬'의 가치를 설명한다.

또한 아이들이 주인공인 것은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아이의 시선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하고, 이런 복잡한 어른들의 속사정을 주인공이 짊어지지 않도록 영리하게 부담을 덜어준다. 대신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아이들을 대신해 해적단 도라가 라퓨타 섬까지의 여정을 조력자의 역할로 수행한다. 라퓨타 섬에 도착한 아이들은 비로소 주체적으로 악당 무스카와 대립하여 섬을 누구도 갖지 못하게 없애버리고 그들이 바라는 땅 위의 삶으로 복귀하는 선택을 내린다.

2026년의 시선에서 이 작품을 바라봤을 때 한 번만 모습을 비추고 사라지는 조연들이나, 맥거핀(플롯이 개연성을 가지게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이지만 적극적으로 부각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사라지는 서사적 장치)처럼 동작하는 라퓨타 섬은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되려 86년도 작품임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지브리의 후속작들을 생각한다면 지브리만의 문법을 정립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또한 창작자의 시선에서 관객에게 거부감없이 주제의식을 전달하기란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님을 이해했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대표 주제의식인 '자연주의', '과학기술과 전쟁의 위험성'을 관객의 가슴 속에 사뿐히 놓았다. 주제의식들이 따뜻하고 누구나 동감하는 평화와 관련된 것들이기에 더 쉽게 힘을 얻지 않았나 싶다.

한줄평: 굉장히 정석적인 플롯, 지브리만의 동화같은 연출, 처음부터 끝내주는 OST